뉴스에서 반도체 수출 호조 소식이 나올 때마다 “그래, 우리 잘하고 있잖아”하고 넘겼는데, 어느 날 그게 정말 우리 실력인지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건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경제가 지금 어떤 구조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그게 얼마나 취약한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 솔직히 좀 겁이 났습니다.
반사이익, 실력인가 행운인가
석유화학, 철강, 조선처럼 한때 한국 경제를 떠받쳤던 산업들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국 기업들이 가격을 무섭게 낮추면서 점유율을 빼앗아 가는 동안, 포항 일대 철강 중견기업만 구조조정 상태에 들어간 곳이 최소 14곳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지방 소멸 얘기가 나오는 지역들을 보면 그게 단순한 숫자가 아니더군요.
그 와중에 반도체와 조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곰씹어 보면, 상당 부분이 미중 갈등이라는 외부 변수 덕분입니다. 공급망 디커플링(Decoupling), 즉 미국이 중국을 글로벌 공급망에서 의도적으로 분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빈자리를 한국이 채운 것입니다. 화웨이가 TSMC를 통해 제조하던 자체 설계 AP를 트럼프 행정부가 차단하면서 스마트폰 사업이 무너진 게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 노광장비, 즉 EUV(Extreme Ultraviolet) 장비를 중국이 구입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네덜란드를 통해 수출을 통제하면서, 중국의 첨단 반도체 기술은 사실상 10년 전 수준에 묶여 있습니다. EUV란 빛의 파장을 극도로 짧게 만들어 반도체 회로를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일 수준으로 새기는 장비로, 최첨단 칩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설비입니다.
이걸 두고 “어쨌든 한국이 수혜를 받은 건 맞잖아요”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수혜의 성격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외부 환경이 만들어준 공간을 채운 것과 자체 기술로 경쟁자를 앞선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AI 수요와 반도체 호황의 실체
ChatGPT가 나온 이후로 제 주변에서도 “AI가 메모리를 얼마나 쓰길래”라는 질문이 많이 나왔습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에는 소프트웨어 서비스가 반도체 수요를 직접 밀어올린다는 개념이 잘 안 잡혔습니다. 그런데 AI 모델이 사용자 데이터를 기억하고 여러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는 에이전트(Agent) 형태로 진화하면서,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메모리 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특히 HBM(High Bandwidth Memory), 즉 고대역폭 메모리가 핵심입니다. HBM이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를 매우 빠른 속도로 전송할 수 있게 만든 고성능 반도체로, AI 연산에 필수적인 부품입니다. 현재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고, 이것이 최근 한국 반도체 수출 실적을 끌어올린 핵심 동력입니다.
그런데 이 호황이 얼마나 갈지는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가 정책 자금을 대규모로 투입하며 D램 기술을 추격하고 있고, 더 심각한 변수는 미국 인텔이 소프트뱅크와 손잡고 기존 HBM과 다른 구조의 메모리를 개발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원조 D램 강국이었던 미국이 다시 메모리 시장에 뛰어든다면, 한국의 독주 체제가 흔들릴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반도체 산업 동향에 대한 더 구체적인 수치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반도체 호황을 “한국 반도체가 세계 최고라서 당연히 이렇게 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해석에 절반만 동의합니다.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이 기회조차 잡지 못했겠지만, 기회 자체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니까요.
조선·방산·원전, 반사이익의 확장
반도체만이 아닙니다. 조선업도 비슷한 구조입니다. 중국이 저가 공세로 점유율을 늘리면서 한국 조선업은 한동안 수주가 반토막이 났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중국산 선박에 입항료를 부과하겠다고 예고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건 조선업의 체질이 개선된 게 아니라, 지정학적 변수가 또 한 번 작동한 것입니다.
방위 산업과 원자력 발전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와 중국이 각각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 문제로 서방과 갈등을 빚으면서, 유럽과 중동 국가들이 무기와 원전 파트너를 바꾸는 과정에서 한국이 들어설 자리가 생겼습니다. 한국 방산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는 확실히 경쟁력이 있습니다. 다만 방위 산업이라는 시장의 특성상, 물건 품질만큼이나 “이 나라에 우리 안보를 맡겨도 되느냐”는 신뢰 관계가 대형 계약을 좌우합니다. 가성비만으로는 거대한 방산 파이를 가져오기 어렵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안보 측면에서도 불안한 요소가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 연합 훈련을 축소하고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한국이 핀란다이제이션(Finlandization)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핀란다이제이션이란 강대국의 압력 앞에 작은 국가가 자국의 외교 주권을 스스로 제한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현상을 뜻합니다. 만약 미국과 북한이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타결짓는다면, 한국은 핵우산을 잃고 독자적인 안보 전략을 재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몰릴 수 있습니다. 미국 RAND 연구소도 한반도 안보 시나리오 분석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다룬 바 있습니다.
지금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석유화학·철강 등 구산업은 중국의 저가 공세로 구조조정 압박이 심화되는 중
- 반도체·조선·방산은 미중 갈등과 AI 수요 덕분에 반사이익을 누리는 중
- 반사이익의 지속성은 트럼프 정책 기조와 중국의 기술 추격 속도에 달려 있음
- 안보 환경도 한미 동맹 약화 가능성이 있어 경제 외적 리스크가 동시에 커지는 상황
생산성혁명, 지금 당장 써먹어야 하는 이유
튀르키예 이야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금리를 올리면 물가가 오른다”는 잘못된 경제관을 밀어붙이며 금리를 낮추고 통화량을 100배 늘린 결과,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 즉 통화 가치가 급격히 무너지며 물가가 통제 불능 상태로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연간 물가 상승률이 85%를 넘어서자 의사와 엔지니어 등 고급 인재의 70%가 해외로 빠져나갔습니다. 잘못된 정책 하나가 어떻게 국가 전체의 미래 역량을 갉아먹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한국은 다른 방향의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AI 분야 고급 인재들이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도 자체 LLM(대형 언어 모델, Large Language Model)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나오는데, 저는 이 접근이 자원을 잘못 배분하는 방향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수십조 원이 투입된 미국 AI 기업들을 따라잡으려 애쓰기보다, 이미 나와 있는 AI를 도구로 삼아 각자의 생산성을 2~3배 끌어올리는 게 현실적입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한국인들이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산업 구조를 재편하면서 1만 달러였던 1인당 GDP를 3만 달러로 끌어올린 것처럼, 지금은 AI를 활용한 생산성 혁명이 그 역할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제가 직접 AI 도구를 업무에 써봤는데, 단순 반복 작업이 줄어드는 건 확실하지만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결국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더군요. 도구는 이미 나왔고, 문제는 우리가 그걸 얼마나 진지하게 쓰느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한국 반도체 호황이 진짜 기술력 때문인가요, 아니면 운 때문인가요?
A. 둘 다라고 보는 시각이 맞습니다. 기술력이 없었다면 기회를 잡지도 못했겠지만, EUV 장비 수출 통제와 미중 갈등이라는 외부 조건이 없었다면 지금의 호황은 훨씬 작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었던 것”과 “스스로 경쟁자를 앞선 것”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HBM이 뭔가요? 일반 D램과 뭐가 다른 건가요?
A. HBM(High Bandwidth Memory)은 D램 칩을 수직으로 여러 개 쌓아서 데이터 전송 속도를 극대화한 고성능 메모리입니다. AI 연산에서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아야 하는데, 기존 D램으로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서 HBM이 필수가 됐습니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에 납품하며 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Q. 튀르키예가 경제를 망친 이유가 단순히 에르도안 한 명의 잘못인가요?
A. 에르도안의 잘못된 금리 정책이 결정적 원인인 건 사실이지만, 특정 지도자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구조적 문제를 놓칠 수 있습니다. 이슬람 보수층의 두터운 지지 기반, 오스만 제국 향수를 자극하는 정치 문법, 세대 간 경제 인식 차이 등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습니다. 경제 현상을 한 사람의 실수로만 단순화하면 정확한 진단이 어렵습니다.
Q. 한국도 인재 유출 문제가 심각한가요?
A. AI와 첨단 기술 분야에서 고급 연구 인력이 미국 등으로 빠져나가는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튀르키예처럼 극단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인재 유출이 장기화되면 기술 경쟁력의 토대 자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자체 LLM 개발보다 AI를 활용한 생산성 향상에 더 집중하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Q.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실제로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나요?
A. 경제와 안보는 별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동되어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경제 제재가 풀린다면, 외국 기업들이 한반도 리스크를 재평가하고 투자 결정을 바꿀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보 불안이 커지면 환율, 외국인 자본 유출 등 경제 지표에 직접 충격이 올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은 “운이 좋았다”는 것과 “잘하고 있다”는 것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 운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반사이익에 기대면서 안도하는 게 아니라 AI 도구를 진지하게 익히고, 기존 산업의 기술 격차를 실질적으로 벌려두는 것입니다. 제가 이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나서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호황일 때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위기는 훨씬 가혹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ivGH4pKY4Q